"그 모든 노력, 정말 말짱 도루묵일까?"
아마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밤을 새워 준비한 면접에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돌아왔던 날. 연애에 온 마음을 다 쏟았지만 끝내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 정성을 들여 만든 자료가 회의 한 번에 사라졌을 때. 그럴 때 우린 흔히 이렇게 말하죠. “말짱 도루묵이었네.”
처음엔 그저 유쾌한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이 말에는 우리 삶의 진한 허탈감이 묻어 있습니다.
뭔가 잘 될 것 같았고, 확신도 있었고, 심지어 약간은 기대까지 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을 때. ‘헛수고’라는 말보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입에 착 감기는 건, 그 안에 우리가 참 많이 겪어온 감정이 녹아 있어서일 겁니다.
이 말의 유래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때 피난 중 우연히 먹은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은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궁궐에서 다시 그 생선을 먹어보니 맛이 형편없었고, 그래서 “도로 묵이라 불러라”고 했다는 거죠. 그렇게 '도로 묵'이 '도루묵'이 되고, 거기에 ‘말짱’이라는 말이 붙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표현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도, 씁쓸한 농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속담은 노력과 결과, 기대와 실망 같은 주제를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왜 어떤 일이 허사가 되었을 때 그렇게 깊은 상실감을 느끼는 걸까요?
왜 이토록 자주 ‘헛수고’라는 말에 공감하게 될까요?
최근 화제가 된 영화 <파묘>에서도 이런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생선 ‘은어’는, 한때는 귀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어떤 의미를 잃어버린 채 등장합니다. 과거의 가치가 현재에선 무력해지는 그 상황은, 어쩌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과도 겹쳐집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의 어원과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헛수고의 의미, 그리고 영화 <파묘>와 연결되는 철학적 상징까지 차근차근 살펴보려 합니다. 혹시 당신도 지금, 어떤 일을 놓고 "말짱 도루묵이었나?" 생각하고 있다면… 이 이야기를 함께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말짱 도루묵: 역사와 언어의 결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은 그 유래부터가 꽤 흥미롭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은 전란을 피해 피난 중 한 지방에서 생선 한 마리를 접하게 됩니다. 그 생선의 이름은 '묵'이었고, 당시로선 이름도, 맛도 생소했겠지요. 선조는 그 생선을 꽤 마음에 들어 했고, “이 생선은 은처럼 귀하다”며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궁궐로 돌아와 다시 그 생선을 먹었을 때, 그 맛은 기억과 달랐습니다.
아마도 전쟁 중 배고픔과 긴장 속에서 느꼈던 맛과, 평상시의 입맛은 전혀 달랐던 걸지도 모르죠.
선조는 실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로 묵이라 불러라.” ‘다시 묵’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도로 묵’이 ‘도루묵’이 되었고, 여기에 ‘말짱’이라는 강조 표현이 붙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속담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표현이 살아남고 일상어로 정착한 데에는, 단지 유쾌한 일화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말짱 도루묵’은 결과가 전혀 없거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느끼는 씁쓸함을 매우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감정에 밀착되어 계속 쓰이게 된 것이겠지요.
헛수고의 감정 구조: 왜 우리는 ‘말짱 도루묵’을 느끼는가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헛수고’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은 기대를 품는 존재이고,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자원을 씁니다. 시간, 노력, 감정 등.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죠.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은 종종 '무력감'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들인 이 모든 건 뭐였지?”
철학자들도 이 감정의 정체에 오래도록 천착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내적 태도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아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의미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에서 나온 사유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불교적 관점에서는 ‘무상(無常)’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진리를 강조하며,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을 통해 염불을 평생 외워도 정작 극락왕생에 실패하는 존재의 허무를 표현하기도합니다.
결국 헛수고는 인간의 실존적인 감정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때로는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됨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영화 <파묘>와 ‘은어’: 다른 생선, 닮은 상징
2024년 개봉한 영화 <파묘>는 조선과 일본, 현재와 과거, 죽음과 기억이 얽힌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일본 장군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 장면에서 '은어'가 제물로 등장하는데, 이 은어는 역사적 배경과 연결되는 흥미로운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은어(鮎)는 맑고 찬 강물에서 서식하는 민물고기로, 여름철 일본과 한국에서 귀한 생선으로 취급됩니다. 반면 도루묵은 바닷물고기로, 겨울철에 잡히며 주로 동해안에서 소비되는 생선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은어와 도루묵은 완전히 다른 어종이며, 조리 방식이나 식문화적 위치도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영화 <파묘>에 등장하는 ‘은어’를 보며 ‘말짱 도루묵’이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될까요?
여기에는 의미의 변동, 상징의 붕괴, 그리고 기대와 현실의 어긋남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작동합니다.
영화 속 은어는 처음에는 정성스럽게 마련된 제물로 등장합니다. 그 상징은 분명하게 나타나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중요한 인물에게 바쳐졌던 귀한 존재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의식은 실패로 돌아가고, 은어는 결국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남겨집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겨왔던 대상이 어떤 맥락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선조가 전란 중엔 은어라며 감탄했지만, 현실의 궁궐에서 다시 마주한 그 생선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의미는 맥락을 따라 변하고,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상징은 고요히 무너집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살아 숨 쉬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 <파묘>의 은어는 생선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상징으로서 도루묵과 공명합니다. 기대와 가치가 부여된 사물이, 어떤 순간에는 텅 비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공통된 정서적 구조가, 이 두 생선을 하나의 철학적 장면 안으로 엮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도루묵’들: 헛수고를 다시 생각하다
현대사회는 효율을 숭상합니다. 결과 중심의 사고는 일을 잘하는 기준처럼 여겨지고, ‘노력’은 종종 결과가 좋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결과가 없을 경우 그 모든 과정은 정말 무가치한 것일까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떤 일에서, 마음을 다해 애썼던 경험은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물론, 그 결과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고, 노력한 것만큼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짱 도루묵 같았던 순간들은 오히려 우리의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장면들일지도 모릅니다.
말짱 도루묵.
짧고도 강한 이 표현은, 때론 푸념처럼, 때론 자조 섞인 유머처럼, 때론 침묵 뒤의 한숨처럼 쓰입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실패나 아쉬움 이상의 것이 깃들어 있는데, 무엇을 기대했는가, 어떤 노력을 들였는가, 그리고 그 끝에서 어떤 감정을 마주했는가에 따라, 더 깊고 넓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헛수고’를 경험합니다. 돌아보면, 너무 힘들었던 일인데 결과가 허무할 때도 있고, 정성을 다했지만 오히려 멀어졌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말짱 도루묵’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하고, 현실에 체념하기도 하죠.
하지만 정말 모든 게 헛수고였을까요?
조선의 선조가 전쟁 중에는 귀하게 여겼던 생선을, 전쟁이 끝나고는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그 장면은, 사실 시간과 맥락이 의미를 바꾸는 힘을 보여줍니다. 맛은 바뀌지 않았지만, 경험과 기억은 그것을 다르게 느끼게 했죠.
그러니 도루묵이 된 것은 생선이 아니라, 그 생선을 바라보는 ‘기대’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파묘>에서 등장하는 ‘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생선은 어떤 이들에게는 오래된 기억 속 귀중한 대상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무력하게 기능을 잃습니다.
그렇게 은어는, 생물학적 정체를 넘어 ‘상징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도루묵과는 다르지만, 공통의 정서를 자극하며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을 환기시키는 것이죠.
철학적으로 본다면, 헛수고란 결국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과 마주하는 경험입니다.
완전한 계획도, 완벽한 예측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늘 결과를 알 수 없는 길을 걷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실패하고 무너진다 해도,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그만큼 살아있는 인생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은 그래서,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허무함의 끝이 아닌, 성찰의 시작으로 남는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이야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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