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화의 문을 연 선각자,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의 시대
 

개화의 문을 연 선각자,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의 시대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정치, 언론, 의학, 독립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이며,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통해 근대적 민주주의와 시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미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

 

서재필은 18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논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882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습니다. 이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개화파로 활동하며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힐맨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워싱턴 D.C.의 코코란 과학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892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 정부의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의학 연구에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박테리아'라는 용어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등 근대 의학의 도입에 기여하였습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역적 누명이 벗겨지자 그는 귀국하여 1896년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한글과 영어로 발행되어 국민 계몽과 외국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같은 해 그는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토론회, 강연회,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국민의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발로 인해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한국평론(Korea Review)' 등의 영문 기관지를 발간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습니다. 

 

광복 후 그는 미군정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최고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1951년 미국에서 후두암과 방광암으로 별세하였습니다.

 

서재필은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민주주의와 시민 계몽,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삶은 개화와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 1. 유년기와 개화 사상의 태동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대구(大丘)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송재(松齋)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했으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한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불과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으며, 1882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정6품)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관리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생존과 근대화를 고민하는 개화파(開化派) 청년들과 교류하며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이때 그가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구 문물과 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진보적 개화주의자였다.

 

📌 2. 갑신정변과 첫 번째 망명

1884년, 그는 개화파 청년들과 함께 근대화된 입헌 군주제 도입을 목표로 한 갑신정변에 가담한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에 의존하던 조선의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꿈꿨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불과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서재필은 체포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후 일본에서의 체류도 오래가지 못한 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조선 왕조로부터는 역적으로 낙인찍혔고, 그는 신분, 지위, 국적, 언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 3. 미국 이민자에서 의사까지  ‘Philip Jaisohn’의 길

미국에서 그는 자신을 Philip Jaisohn(필립 자이손)이라고 이름 짓고, 철저히 미국식 삶을 시작했다. 힐맨 아카데미(Hillman Academy, 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예비과정)를 거쳐, 워싱턴 D.C.의 코코란 과학학교(Corcoran Scientific School)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892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하였으며, 이는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유례없는 사례였다.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 정부의 병원에서 의사 및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특히 박테리아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근대 의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 그는 이후 조선에 귀국한 뒤 "박테리아"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 도입한 인물로, 전염병 예방과 위생 개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는 단순한 의료 활동을 넘어 조선 사회의 공중보건 개혁의 첫걸음이었다.

 

📌 4. 조선 귀국과 민중 계몽 – 언론과 민주주의의 불씨

1895년, 조선 정부가 갑오개혁을 단행하면서 서재필의 역적 누명이 벗겨지고 귀국이 허용되었다. 귀국 직후 그는 세 가지 중대한 업적을 남긴다:

① 독립신문 창간 (1896년 4월 7일)

  •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 최초의 한글 중심 신문 (국문·영문 병용)
  • 민중 계몽과 서구 사상 도입의 핵심 통로
  • 독립정신, 자주권, 민권 의식을 고취
  • 미국식 언론 모델을 바탕으로 발행, 사설·기사·논설 구성

② 독립협회 조직 (1896년 7월)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

  • 지식인뿐 아니라 상인,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 참여
  • 만민공동회 개최: 공개 토론, 자유 발언, 시민 정치 참여 모델
  • 외세 배척, 자강 개혁, 헌정 수립 요구
  •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하여 절대왕권에 반기

③ 교육운동과 강연 활동

  • 시민 대상으로 위생, 교육, 정치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
  • 신문과 병행된 강연은 ‘지식의 대중화’를 실현함
  • 오늘날의 ‘시민교육’의 원형

📌 5. 다시 미국으로 – 독립운동과 외교활동

보수적 유생과 권문세가의 반발로 인해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한국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

✦ 필라델피아에서의 활동:

  •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한인 유학생 및 이민자 지원
  • 1919년 3·1운동 직후, 한인연합대회 개최
  • ‘Korea Review’ (한국평론) 발간 – 영문 월간지로 세계에 독립운동 소개
  •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외교 활동 지원

그의 활동은 미국의 정책결정자와 언론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는 창구였으며,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역할을 했다.

📌 6. 해방 후 귀국과 최후의 삶

1945년 광복 후, 서재필은 미군정의 초청으로 귀국했다. 그는 한국 정치의 원로로서 국민 교육과 헌법 제정 등 여러 자문 역할을 맡았으나,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분열로 인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1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후두암과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한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1994년 국립묘지에 안장하며, 그의 공로를 기렸다.

📚 저서 및 언론 활동

🔸 『Korea’s Fight for Freedom』 (공동기획)

  • 영어로 출간된 한국 독립운동 관련 서적
  •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일제의 탄압, 독립의 정당성을 알림

🔸 『Korea Review』

  •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 월간지
  • 한국 독립운동을 미국 사회에 소개

 

서재필, 개화의 불꽃이 남긴 유산

서재필은 단순한 정치인이나 의사가 아니라, 한국 근대화의 길목에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는 갑신정변이라는 급진적인 혁명 시도를 통해 낡은 왕조 질서에 맞섰고, 실패 후에도 외국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였다. 그의 삶은 실패와 성공, 망명과 귀환, 외국인과 조선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개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통과해낸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재필이 남긴 유산은 다양하다.


그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치 참여, 시민 계몽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켰고, 오늘날 한국 언론과 시민운동의 뿌리를 마련했다. 또한 근대 의학을 도입하고 공중보건 개념을 확산시킨 의료인으로서의 기여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서재필

 

그의 영향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뚜렷해졌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그의 사상과 철학을 따라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언론 자유를 기본 가치로 삼았고, 그의 삶은 자기희생과 원칙 있는 실천의 상징으로 기억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서재필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 개혁은 외부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는 조선 밖에서 조선을 개혁하려 했다.
  • 지식은 힘이다. 그는 계몽을 통해 민중을 변화시키려 했다.
  • 표현과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서재필은 단지 '조선의 첫 미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다리였고, 독립을 향한 시선의 시작점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의학과 언론의 많은 뿌리가 그의 사상과 실천에 닿아 있다.

그의 이름은 사라질지언정, 그가 남긴 ‘생각’은 오늘날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