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민주주의다” – 3·15 의거,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외침
 

“우리가 민주주의다” – 3·15 의거,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외침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쳐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해갔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된 잉여 농산물은 국내 곡물 가격을 하락시켜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동했지만, 도시 역시 실업률이 높아 이들을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3·15 의거
출처-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 재선된 그는 1954년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폐지했다.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후에는 더욱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고, 국가보안법 개정을 통해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며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다.

 

1956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선거 직전 급사하면서 이승만은 큰 저항 없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이기붕을 반드시 당선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선거를 조작하기 위한 조직적인 계획이 수립되었고, 전국적으로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한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계획한 부정선거는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사전투표 조작, 3인조·9인조 공개투표 강요,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방식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했으며, 공무원과 교육자까지 동원해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강요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에는 정치깡패들을 이용해 야당의 선거 유세를 방해했고, 심지어 야당 의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려 했다.

 

이러한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던 가운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단독 출마로 사실상 자유당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더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강행했다.

3·15 의거의 전개 – 부정선거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마산을 비롯한 전국의 투표소에서는 사전투표 조작, 공개투표 강요,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가 노골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목격한 시민들은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3·15 의거
출처-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특히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하는 등 부정이 명백해지면서 마산 시민들은 강한 반발을 보였다.

 

선거 당일 오후, 마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당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점차 규모가 커지며 도심 곳곳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곤봉과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시위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시민들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결국 경찰은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부상을 입거나 체포되었고, 마산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3·15 의거
출처-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3월 15일 시위 이후,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 실종되었으나 가족들은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한 시신이 떠올랐다.
그 시신은 실종된 김주열 군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마산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김주열 군의 희생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시위는 마산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4월 19일 대규모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벌어졌다.

3·15 의거
출처-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실탄을 발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4월 25일에는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하와이로 망명했다. 3·15 의거는 선거 부정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 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현재도 마산에는 3·15 의거 기념탑과 국립 3·15 민주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3월 15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시민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이어가야 할 역사적 유산이다.

3·15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

3·15 의거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민들이 독재 정권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최초의 대규모 저항 운동이었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것을 넘어,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했던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다.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고, 그들의 희생이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되어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주열 열사의 희생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곧 전국적인 시위 확산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불러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은 독재 정권이 영원할 수 없으며, 국민의 힘이 모이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며 대한민국은 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3·15 의거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작점이었으며, 이후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시민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감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마산에는 국립 3·15 민주묘지와 기념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3월 15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지키기 위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되새기는 자리이다.

3·15 의거
출처-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나가야 하는 가치이다.


3·15 의거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야 함을 의미한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과거의 희생과 투쟁을 기억하며 그 가치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