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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러다이트, 다시 등장할 것인가?

삶을 그리다 2025. 7. 30. 17:21
기계가 인간을 위협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기계는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일까, 아니면 빼앗는 존재일까?”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로 끊임없이 이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200여 년 전, 영국의 방직공들은 새로 도입된 자동직기와 방직기계 앞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고된 기술을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공장주들은 훨씬 더 효율적인 기계를 도입하면서 고용을 줄이고 임금을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들 노동자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기계를 부수는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이것이 바‘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시작입니다.

AI 시대의 러다이트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이 역사적 장면을 그저 과거의 사건으로만 바라보아도 되는 것일까요?


기계가 방직공의 일을 대신했던 19세기와 달리, 21세기의 기계는 사람의 '생각'까지 대신하려고 합니다. 대화하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짜고, 심지어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챗GPT, 미드저니, 코파일럿, 클로드 같은 생성형 AI들은 인간의 지식노동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일부 직종은 변화의 전선에서 급속히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 변화 속에서, 또다시 러다이트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AI를 활용한 새로운 기회와 생산성 향상을 노래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나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 변화를 통제할 수 있는가?”와 같은 불안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일 수도 있지만, 통제되지 않은 기술은 불평등을 심화하고, 특정 계층만을 위한 부의 축적 수단이 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기술을 무작정 환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제동을 걸어야 할까요?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를 미워한 사람들’이라는 피상적인 평가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분노는 비이성적인 감정이 아닌, 삶의 권리를 박탈당한 절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술 자체보다도, 기술이 가져오는 사회적 불평등,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을 역사 속 반항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단서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AI와 자동화 기술이 삶의 구조를 바꾸는 이 시점에서, 다시금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일은 학문적 호기심이 아닌 생존과 공동체, 인간성에 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의 본질과 AI 시대의 유사한 징후들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기술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역할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합니다. 러다이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정신은 형태를 달리해, AI의 질주 앞에서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1. 러다이트 운동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은 1811년부터 1817년 사이에 영국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노동자 저항 운동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기계 파괴라는 격렬한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종종 ‘기술 혐오’ 또는 ‘시대착오적 반발’로 오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운동의 본질은 기계 그 자체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기술 도입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과 생계 위협에 대한 집단적 절규에 가깝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속속 등장했고, 기계화는 노동력 의존도를 급격히 낮추며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공장주들은 직물을 수작업으로 짜던 수공업자들을 대체하고자 자동직기(power loom)재봉기계(spinning frame) 같은 혁신적 장비를 도입했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숙련 기술은 점점 가치가 떨어졌고, 임금은 하락했으며, 해고되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갑작스럽게, 그리고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러다이트 운동

 

러다이트 운동은 바로 이러한 절박한 현실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설 속 인물인 ‘네드 러드(Ned Ludd)’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루디트(Luddite)’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집단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음을 느꼈고, 자신의 삶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가 아니라, 정확하게 특정 공장과 기계만을 겨냥한 계획적인 파괴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였다고 평가됩니다.

 

주목할 부분은, 러다이트들이 기술 발전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장과 기계가 완전히 철거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정한 임금, 안정된 고용, 협상의 기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도입이 사회적 안전망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되었을 때 어떤 불균형이 초래되는지를 경고하는 사회적 외침이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당시 지배계층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들을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며, 일부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수백 명이 호주로 추방당했습니다. 1812년, 영국 의회는 ‘기계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런 강경 대응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치가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정치적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 러다이트 운동을 당시 노동자들이 활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협상 수단으로 해석합니다. 노동조합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정치적 발언권도 제한되어 있던 시기,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방식으로 기계 파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러다이트 운동은 오늘날의 노동운동, 기술윤리,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을 개선하지는 않으며, 그 기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어떻게 분담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에 반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을 배제하고 기술을 우선시한 사회 시스템에 반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점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오늘날 AI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2. 생성형 AI는 왜 또 다른 러다이트를 부르는가?

2020년대 초반, 전 세계는 인공지능 기술의 급속한 진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챗GPT, 미드저니, DALL·E, 클로드, 코파일럿 등으로 대표되는 생성형 AI(Generative AI)는 이제 보조 도구가 아닌, 인간의 창의성과 사고력 자체를 대체하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산업혁명 시기의 기계화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으며, AI로 인한 제2의 러다이트 운동 가능성을 현실적 문제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러다이트

 

우선, 생성형 AI는 기존의 자동화 기술과는 다릅니다.

산업혁명의 기계화가 육체노동을 대체했던 반면, 오늘날의 생성형 AI는 지식노동창의노동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텍스트를 생성하는 AI는 작가, 기자, 카피라이터의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할 수 있으며, 이미지 생성 AI는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의 작업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음악, 영상, 코딩까지 아우르는 AI는 반복 작업뿐 아니라 창조적 결정과 감성적 판단이 요구되던 영역까지도 모방하고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 변화는 곧장 경제 구조와 고용 환경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글로벌 리서치 기업 맥킨지(McKinsey)는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3억 명 이상의 노동자가 AI로 인해 직무 전환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습니다. 특히 교육, 미디어, 법률, 금융, 고객 서비스 등 백색 칼라(white-collar) 직종이 대거 타격을 입을 수 있으며, 고등 교육을 받은 숙련 노동자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AI 기술을 개발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소수의 거대 IT 기업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기술에 의한 가치 창출이 극소수에게만 집중되는 구조적 불균형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적 변화는 19세기 러다이트들이 겪은 경험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당시에도 기계는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였지만, 그 혜택은 소수의 자본가에게만 집중되었고 다수의 노동자는 생계 위기에 몰렸습니다. 오늘날 생성형 AI의 도입 역시 일부 기업의 비용 절감과 수익 증대를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될 경우,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은 오히려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디지털 루디트(Digital Luddite)”라는 표현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예술가, 작가, 교수, 노동자, 기술자 등 다양한 직군에서 AI의 무분별한 도입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일부는 AI 사용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할리우드 작가 조합(WGA)과 배우 조합(SAG-AFTRA)의 파업은 AI가 각본을 작성하거나 배우의 외모를 복제해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를 동반했는데, 일자리를 지키려는 행동이 아니라, 창작의 권리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수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AI가 사용하는 학습 데이터에 대한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부 이미지 생성 AI는 작가의 허락 없이 온라인에 게시된 수많은 작품을 무단 수집하여 학습에 활용하고 있으며, 텍스트 AI 역시 방대한 인터넷 콘텐츠를 출처 없이 흡수해 훈련됩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일러스트레이터와 작가들이 AI 기업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고 있으며, “내 노동을 허락 없이 학습한 AI가 나를 대체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움직임이 퍼지고 있습니다.

 

또한, AI가 대체하는 것은 직업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쌓아온 감정, 해석, 맥락, 도덕 판단 등은 아직까지 기계가 완벽히 재현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경제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구조에서는 ‘충분히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기술’만으로도 인간이 밀려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다움이 시장 논리 앞에 후퇴하는 순간, AI에 대한 반감은 거부감을 넘어 존엄에 대한 본능적 저항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AI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의 부재를 드러냅니다. 기술은 인간에게 도구일 수 있지만, 인간을 도구로 만드는 기술은 공동체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러다이트 운동이 던진 질문, 즉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 문제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에 대한 성찰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3. 현대판 러다이트? 저항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를 파괴하는 물리적 방식으로 저항을 표현했던 대표적인 전근대형 집단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AI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사람들의 저항 방식은 과거와 비교해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며 제도화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격렬한 폭동이나 파괴행위가 줄어든 듯 보이지만, 기술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와 사회적 움직임은 오히려 더 체계화되고 조직화되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러다이트

 

무엇보다도 현대판 러다이트는 특정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술가, 노동자, 교사, 엔지니어, 공무원 등 다양한 직종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체감한 이들이 연대하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I 기술의 침투 범위가 너무나 넓고 빠르기 때문이며, 더 이상 일부 산업군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2023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AFTRA)의 공동 파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AI가 각본을 생성하거나, 배우의 외모·음성을 디지털로 복제해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계약서에 AI 관련 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고, 인간 창작자의 권리와 존재 이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파업은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AI 기술이 인간 창작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전면에 떠오른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와 시각예술가들 사이에서 미드저니(Midjourney),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과 같은 이미지 생성 플랫폼이 자신들의 그림을 무단으로 학습데이터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작품의 고유성과 창작자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AI에 대한 집단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AI가 학습한 스타일을 모방하여 "유사하지만 법적으로 구분 가능한" 결과물을 내놓는 방식은, 창작물의 표절과 차별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노동계 역시 AI 도입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콜센터, 번역, 데이터 라벨링, 문서 검토 등 반복적이고 단가가 낮은 노동은 AI로의 대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노동의 질적 하락과 일자리 축소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노동조합은 AI 도입에 앞서 직무 재편과 재교육 시스템 마련, 고용 보장 정책의 동시 추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미래를 논의하는 국제 회의에서도, AI 도입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러다이트는 기계 파괴를 넘어서, 법적 제도화, 정책 개입, 시민 저항, 국제 연대 등 다양한 전략을 동반하며 다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도구를 파괴해야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기술을 둘러싼 윤리적·사회적 논의를 촉진하고,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러다이트’라는 단어가 여전히 기술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판 러다이트는 과거와 달리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도입과 그로 인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AI 기술이 무섭고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해 작동하고, 누구의 권리를 침해하며,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적 대화를 요청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에 대한 저항’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게 만듭니다. 이제 저항은 반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술을 윤리적으로 관리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공정하게 누릴 수 있도록 설계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것—이러한 능동적 개입과 감시야말로, 오늘날의 러다이트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4. 기술 진보를 멈출 수 없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기술은 한 번 등장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증기기관이 인류의 일하는 방식을 바꿨던 것처럼, AI와 같은 첨단 기술도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는 인간의 의지와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습니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인간을 도울 수도, 소외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술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AI 시대의 러다이트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에 대한 사회적 합의입니다.

기술 발전이 기존 일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 재배치, 복지 정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술은 효율성을 추구하지만, 사회는 공정성과 인간다운 삶을 전제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화에 의해 대체된 직무의 노동자들에게 해고 통보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과정과 전환 지원금, 재고용 프로그램이 동시에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AI 기업이 이윤 일부를 사회 환원 형태로 기여하도록 하는 구조적 장치도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권리와 데이터 정의의 확립입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행동, 취향, 감정, 대화 기록 등을 끊임없이 수집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 주권이 침해당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공정한 공존을 위해서는 사용자의 동의 기반 데이터 수집, 알고리즘의 투명성 보장, AI 판단에 대한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 등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준은 기술 설계자의 선의에 맡길 수 없습니다. 국가 차원의 강력한 규제와 글로벌한 법적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며, 시민도 그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기술을 통제하고 사회에 이롭게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윤리적 통찰과 교육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인간의 사고와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을 사용하는 법만이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낼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감수성과 공동체 의식을 함께 교육해야 합니다. 기술 사용자, 개발자, 정책 입안자 모두가 인간 중심의 기술 발전을 공동의 가치로 삼을 수 있도록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사고를 확장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노동과 기술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노동개념은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AI와 원격기술,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이러한 틀을 흔들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프로젝트 기반, 프리랜서 기반, 데이터 제공자 등의 형태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는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노동의 정의를 확장하고, 새로운 고용계약 모델을 실험하며, 기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법·제도를 마련해야 할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술은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 기술이 소수 대기업에 의해 독점되고, 특정 계층만이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술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공 AI 시스템의 개발, 열린 기술 생태계 조성, AI 기술의 공공 연구기관 개방 등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의료, 교육, 행정, 복지 분야에서 공공이 주도하는 AI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민간의 참여를 독려하되, 공익성과 민주적 감시 체계를 병행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기술과 공존한다는 것은 그저 기술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술을 인간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통제하고,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며 사용하겠다는 집단적 합의의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는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공동의 번영을 돕는 도구가 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논의와 교육, 감시와 연대, 법과 윤리의 조화를 통해 의도적으로 구축되어야 합니다.

5. 기술을 인간 중심으로 재설계할 수 있는가?

기술의 진보는 필연적인 현상이지만, 그 방향성과 사용 방식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 산업혁명 시기에도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는 존재했으며, 실제로 러다이트 운동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을 통제하고 방향을 조절하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술을 폐기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인간 중심적으로 재설계하는 일입니다.

AI 시대의 러다이트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 개발의 목표 설정 방식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AI 기술은 ‘효율성’, ‘비용 절감’, ‘생산성 극대화’라는 명분 아래 개발되고 있습니다.

 

시장 중심의 논리로 보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예컨대 존엄, 의미, 상호성, 공동체 의식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기술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인간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휴머니즘 기술 설계(Human-Centered Design)’ 접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사용자의 편의성을 고려하는 수준을 넘어서, 기술이 사용자의 삶의 질, 심리적 안정,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다각도로 고려하는 설계 철학입니다. 예를 들어, AI 챗봇이 사용자의 감정을 인식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 인간의 정서적 소통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기술은 인간의 필요를 보완하는 것이어야지, 인간의 본질을 흉내 내거나 대체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기술 개발 과정에 다양한 사회 집단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술은 소수의 고학력 백인 남성 중심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그로 인해 많은 알고리즘이 특정 성별, 인종, 계층에 대해 편향적 판단을 내리거나, 차별적 결과를 산출하는 사례가 이어졌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기술 설계 과정에서 젠더, 인종, 연령, 장애 여부, 지역 등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할 수 있는 협업 체계와 검증 프로토콜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기술은 특정 집단의 시각만 반영해서는 안 되며, 전 인류의 삶에 영향을 주는 공공재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

 

기술을 인간 중심으로 재설계하기 위해서는 윤리 기준을 기술 설계의 전 과정에 통합하는 작업도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 각국에서는 ‘AI 윤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AI법(AI Act)을 통해 기술의 위험 수준을 분류하고, 고위험 기술에 대한 투명성과 설명 책임을 강화하는 조치를 법제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술 윤리가 선언적 수준을 넘어, 법과 제도 안에서 실질적인 구속력을 갖추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국 역시 국가차원의 AI 윤리헌장과 공공기관의 알고리즘 투명성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등 관련 논의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더불어, 기술을 인간 중심으로 만드는 데에는 ‘기술의 언어’를 일반 시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기술은 전문가의 전유물처럼 다루어졌으며, 일반인은 기술의 원리를 파악하거나 그 영향에 대해 논의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면, 기술의 작동 방식과 결정 구조에 대해 시민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문해력(digital literacy)이 요구됩니다. 기술과 시민사회의 거리를 좁히는 교육 프로그램, 공론장, 시민 참여 기반의 기술 평가 시스템은 이러한 격차를 좁히는 핵심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지만, 그 도구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가치와 철학을 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기술은 개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효율성보다 존재의 의미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기술이 인간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고 가능성을 확장하는 협력자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술과 인간의 진정한 공존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이 인간을 닮지 않도록, 인간이 기술을 설계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다시금 러다이트의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기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1810년대 영국의 방직공들이 마주했던 기계는 그들의 손을 대체하는 도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의 머리를, 더 나아가 우리의 감정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기술에 대한 통제는 기술자의 책무를 넘어 사회 전체의 공동 과제가 됩니다. 러다이트 운동이 말했던 진짜 본질은 기계 파괴가 아니라, ‘기술의 방향을 결정할 권리’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그 요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AI 시대의 러다이트

 

AI는 그 자체로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데이터와 연산 능력, 알고리즘이라는 복잡한 수학적 구조의 산물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어떤 철학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사라질 때, AI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의 수단이 됩니다. 그런 권력은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다수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며, 인간다움을 침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위험이 큽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기술과 인간의 충돌을 겪어왔습니다. 증기기관, 컨베이어 벨트,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항상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가치와 기회를 제공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기술 변화의 순간마다 인간이 주체로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결정이 모두에게 공정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이끌렸는가입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역사 속 과거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기술 자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기술의 무책임한 도입과 사회적 무관심에 저항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기계를 부수는 대신, 기술의 설계 철학을 다시 질문하고, 그 운영 원칙에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인간 중심의 기술 윤리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21세기의 러다이트 정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감시하고 참여하는 시민입니다. 기술의 진보를 찬양하거나 두려워하기 전에, 그 진보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를 묻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 힘은 철학에서 시작되고, 윤리로 확장되며, 제도로 구체화됩니다. 러다이트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러다이트들이 조용히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인간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인간이기를 멈춰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 대답을 찾는 여정에서, 러다이트의 질문은 결코 낡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또렷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