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 그리고 느끼는 일에 대하여
보는 것, 그리고 느끼는 일에 대하여
― 이해라는 이름의 오만을 넘어
우리는 종종 묻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한 발짝 물러선 채 ‘판단자’의 자리에 올라서 버린다.
마치 누군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 혹은 허락을 받은 것처럼.
그러나 삶은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의 선택, 말투, 침묵, 눈빛, 돌아선 어깨까지도
그 사람의 과거와 고통, 기쁨과 망설임이 쌓인 결과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겉모습일 뿐,
그 이면에 흐르는 사연들은 침묵 속에 숨겨진 채 머무른다.
‘이해한다’는 말.
그 얼마나 위로처럼 보이고, 성숙한 말처럼 들리는지.
때때로 그 이해란 말은 무례한 침입이 되고 만다.
"네가 왜 그렇게 사는지 알겠어"라는 말엔,
"그럴 수도 있지"를 가장한 숨겨진 잣대가 섞여 있다.
그 잣대는 언제나 나의 기준을 기준 삼는다.
결국 ‘네 방식은 틀리지만 나는 너를 받아들일게’라는 무언의 판단이다.
이 얼마나 부드럽고, 또 얼마나 무서운 폭력인가.
세상의 수많은 삶은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은 서사이며, 흐름이며, 고요히 지나간 시간이다.
그 삶의 결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우리는 너무 쉽게 옳고 그름을 말해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인간을 사물처럼 해석하려 든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 나-너'의 '나'는 '나-그것'의 '나'와는 다르다 "
그것은 대상이고, 너는 인격이다.
이해는 대상에게 향하는 것이고, 관계는 존재 자체를 향하는 일이다.
‘판단하는 이해’는 관계를 끊고,
‘느끼는 시선’은 관계를 잇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해하려 했던가.
그보다는 얼마나 자주, 조용히 바라보려 했는가.
어떤 이는 이른 아침 쓰러질 듯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웃음 뒤에 쌓인 빚더미를 안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침묵이 유일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모르면서, 우리가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이해란 그런 말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며 동행이다.
말이 아니라 눈으로, 설명이 아니라 ‘함께 있음’으로 전해지는 어떤 것.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기보다는,
그 삶을 잠시 함께 머물러주는 일.
그저 보고, 스며들고, 울지 않아도 슬픔을 알아주는 감각.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말보다, 감각이 필요하다.
판단보다, 여백이.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자리에 조용히 함께 서보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해’일지 모른다.